닮은 꼴 역사 인물 5편: 반소와 안나 콤니니
중국 역사 속 인물과 닮은 이를 서양 역사에서 찾아보는 <닮은 꼴 역사 인물> 시리즈입니다.
반소(班昭)와 안나 콤니니(Anne Komnene)는 널리 알려진 인물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1,000년 이상 6,500킬로미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이 두 여성은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먼저 중국부터 시작해 볼까요.
반소
반소 (49년 ~ 117년)는 중국 최초의 여성 역사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소는 한나라 때 3대에 걸쳐 학자를 배출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평생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반소는 황실 도서관의 사서, 황실 학자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황후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마침내 황족을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반소는 여계(女誡)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합니다. 유교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알려주면서 몸가짐과 행동 규칙을 서술한 이 책은 여성 교육을 위한 도덕적 지침서로 널리 암송되었습니다.
후에 반소는 서한(西漢), 즉 전한(前漢) 시대를 다룬 중요한 역사서인 한서(漢書)를 완성합니다. 아버지 반표(班彪)가 장기간 이어진 이 편찬 사업에 죽을 때까지 매달렸습니다. 부친 작고 후에는 그녀의 오빠, 반고(班固)가 이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반고가 권력 싸움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반소를 임명해 가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반소가 한서를 완성하기까지 1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온라인 검색이 없어 작업 속도가 조금 느릴 수 있었겠지만 반소는 방대한 규모의 황실 기록 보관소에 접근할 수 있었고 또 최소한 요리 블로그를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완성본 한서는 연대기, 열전, 연표, 법조문, 지리, 과학, 제례, 문학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체 120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소는 또한 덕으로 통치 했던 과거의 올곧은 황제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주목할만한 인물을 정리한 고금인표(古今人表)를 만들었습니다. 반소는 2,000명이 넘는 역사 인물들을 소개해 후대인들에게 역사를 공부하는데 중요한 참고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한서는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역사서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하나입니다. 한서의 구성은 후대에 왕조 역사를 기록하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나 콤니니
천년을 뛰어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가 봅시다.
안나 콤니니는 1083년 비잔틴 황제인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의 통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리스 문학과 역사, 철학, 신학, 수학, 의학 분야를 두루 섭렵하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어린 시절부터 전문가들을 교사로 모시며 황실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안나를 1,000병상 규모의 병원을 관리하는 감독관으로 임명했고 거기서 의학 분야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반소처럼 안나는 자신만의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이 태어나 왕위계승자가 되자 이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황이 사망하자 안나는 남동생을 폐위시키려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맞다고 본 남편이 아내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안나의 남편인 니키포로스 브레니아스 2세(Nikephoros Bryennias the Younger) 또한 학자였습니다. 제국의 역사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망하면서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됩니다. 남편과 사별한 안나는 한 수도원에 정착했고 거기서 남편이 남겨 놓은 글을 다듬고 완성하는 작업을 합니다.
말년에 안나 콤니니는 비잔틴 제국의 정치와 군사에 관한 역사서 알렉시아스(Alexiad)를 출간했습니다. 15권 600페이지 분량의 이 역사서는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있으며 유일하게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서 본 제 1차 십자군 전쟁 (1096년 ~ 1099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흡입력 강한 묘사를 구사하는 알렉시아스는 탁월한 중세 역사서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나 콤니니는 서구 문명 최초의 여성 역사가로 꼽힙니다. 바로 반소의 서구 닮은 꼴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반소와 안나 콤니니는 둘 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황실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에 관한 소중한 기록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하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어요. 예를 들어 반소는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죠. 안나는 부(賦) 스타일의 시를 쓴 적도 없고요.
두 여성은 멀리 떨어져 아주 다른 삶을 살았지만 모두 세계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말로 말이죠.
이제 이 시리즈의 중간 정도에 와 있네요. 나머지 닮은 꼴 인물들은 누구일까요?
베티 왕 (Betty 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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