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
한 대(漢代)는 서한(西漢 BC 206-AD 8년)과 동한(東漢 AD 25-220)으로 나뉘며 중간에 왕망(王莽)이 정권을 찬탈해 잠시 신(新)왕조를 세웠다. 한을 개국한 황제가 바로 고조(高祖) 유방이다. 유방의 아들인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과 손자인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啟)는 황로(黃老)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을 쉬게 하고 원기를 회복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해 ‘문경의 치(文景之治)’란 번영기를 열었다.
한대(漢代)는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이 모두 강성한 왕조였다. 무공 방면에서 한무제(漢武帝)는 영토를 확장해 제국의 판도를 서역과 북방까지 신속히 확장시켰다. 문치 방면에서 한은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가 출현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형태를 이룬 조대였다. 또 지금 한족(漢族)이란 호칭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외에 한인(漢人), 한자(漢字), 한어(漢語), 한복(漢服) 등도 모두 한 왕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왕조의 영향력이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중국 4대 발명품의 하나인 ‘제지술’ 역시 한 왕조에서 출현했다.
한조(漢朝)는 또 영웅의 시대였다. 한신(韓信), 주아부(周亞夫), 위청(衛青), 곽거병(霍去病), 이광(李廣) 등의 명장이 군사적으로 불후의 전기(傳奇)를 남겼다.
특히 한무제 시대에 인재가 아주 많았는데 명장(名將) 위청, 곽거병,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 뛰어난 외교관 장건(張騫)과 소무(蘇武), 경제학자 상홍양(桑弘羊), 익살꾼 동방삭(東方朔) 등이 있었다.
중국의 판도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쳤다. 진시황 시기 진나라가 차지한 영역은 한무제 통치 시기 한나라 영역의 절반에 해당했으며 이는 현재 중국 영토의 3분의 1에 불과한 것이다.
한무제는 16세에 제위(帝位)에 올랐으며 17세 되던 해에 장건을 서역(西域)에 파견했다. 뒤이어 위청, 곽거병을 대장으로 임명해 흉노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실크로드를 열었고 중국의 판도를 서역까지 확장시켰다. 한무제는 서역(지금의 신장)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다.
서한에는 모두 12명의 황제가 있었다. 서한 말년에는 외척들이 전권을 행사했으며 결국 왕망에 의해 정권이 찬탈되고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 여러 개의 할거정권이 나타났다. 한고조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가 중국을 재통일해 동한 왕조를 설립했는데 그가 바로 광무제(光武帝)다. 광무제가 붕어한 후 넷째 아들인 유장(劉莊)이 즉위하니 바로 현종(顯宗) 효명황제(孝明皇帝)다. 한명제 때 불법(佛法)이 정식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동한에서도 모두 12명의 황제가 있었다. 동한 말년에 이르러 환관과 외척의 권력다툼이 심해지자 양쪽이 모두 치명상을 입었다. 이 틈을 탄 서북 군벌(軍閥) 동탁(董卓)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洛陽)에 들어와 군벌의 혼전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조조(曹操)가 장강(長江) 이북지역을 기본적으로 통일했고, 손권(孫權)이 강동(江東), 유비(劉備)가 서촉(西蜀)을 차지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헌제(漢獻帝)를 폐위시키고 위(魏)나라를 세웠다. 이 시기가 중국 역사상 삼국이 정립(鼎立)한 삼국시대였다.
2011년 7월 15일